좋은 글(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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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에 선 나무의 전언(傳言) - 이유경
겨울 숲에 선 나무의 전언(傳言) - 이유경 우리와 함께 살았던 잎들은 모두 저승 멀리 가 있단다 그때 흘렀던 냇물 바다 어디선가 지금 흘러가 있듯이 수없이 죽어가 태어나는 것 있으면 흙이나 물에서뿐 썩는 행기그리운 나이에 닿아 우리 여기 숨어 먼저 간 세월 한 올씩 헤기로 하자 그렇게 하자 차가운 비바람 몇날 며칠 밤 저 고사리밭 쑤신 다음 몸살난 뿌리 굵은 새순 내밀 때 우린 악기처럼 만나서 잎들 위에 다른 잎들 썩고또 새잎 떨어져 맨 밑에 저승 천지 적막 죽은 짐승같이 누었음 분명하지만 다들 한알 모래 같은 비료로 돌아가느니 노래하고 싶지 꿈의 허무 서러운 기다림 씻겨 가 버린 나이 되면 우리 사랑하던 사람들 넋이나 되자 그렇게 되자 안개 자욱한 봄날 아침 그들 떠나온 도시와 길을 향해 있어도 없어..
2019.12.20 -
겨울 숲에서 - 안도현
겨울 숲에서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가지 내 할 일은 머리 ..
2019.12.20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향수 / 정지용
향 수 정 지 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
2019.12.19 -
어느 날 오후 풍경 / 윤동주
어느 날 오후 풍경 / 윤동주 창가에 햇살이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 그림처럼 떠 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보다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한가로운 오후 마음의 여유로움보다 삶을 살아온 만큼 외로움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2019.12.19 -
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2019.11.14 -
사랑한다 말 못하고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 나태주
사랑한다 말 못하고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 나태주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꽃이 예쁘다느니, 하늘이 파랗다느니 그리고 오늘은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역에 나가 기차라도 타야 할까 보다고 말을 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온 길 작은 간이역에 내려 강을 찾았다고 그렇게 짧은 안부를 보내주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둔 채로 그렇게 떠나온 도시에서 이 강물이 그렇게나 그립더니만 가을이라 쓸쓸한 노을빛 강가에 서고 보니 그리운 것은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사람이더라고 그렇게 당신의 그리움을 전해왔습니다 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그 강가 갈대 숲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았노라고 말을 했지요 ..
2019.10.19 -
구절초 - 김용택
구절초 김용택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저리도 잔잔히 피어 있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서늘한 저녁 달만 떠오르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드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서늘한 저녁 달만 떠오르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드네
2019.10.19 -
가을 편지 - 정호승
가을 편지 - 정호승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2019.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