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66)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2020.07.14 -
되새 떼를 생각한다 - 류시화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바람을 신으로 모신 유목민들을 생각한다 별들이 길을 잃을까 봐 피라미드를 세운 이들을 생각한다 수백 년 걸려 불과 얼음을 거쳐 온 치료의 돌을 생각한다 터질 듯한 부레로 거대한 고독과 싸우는 심해어를 생각한다 여자 바람과 남자 바람 돌아다니는 북극의 흰 가슴과 히말라야골짜기돌에 차이는 나귀의발굽소리를 생각한다 생이 계속되는 동안은 눈을 맞을 어린 꽃나무를 생각한다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오두막이 불타니 달이 보인다고 쓴 시인을 생각한다 내 안에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자라는 청보리를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보다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을 생각한다 불이 태우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깃 가장자리가 닳은 되새 떼의 날갯짓을 생각한다 뭉..
2020.07.06 -
강천산에 갈라네 - 김용택
유월이 오면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 때동나무 하얀 꽃들이 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히면 환한 때동나무 아래 나는 들라네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가면 산딸나무 꽃도 있다네 아, 푸르른 잎사귀들이여 그 푸르른 잎사귀 위에 층층이 별처럼 얹혀 세상에 귀를 기울인 꽃잎들이여 강천산에 진달래꽃 때문에 봄이 옳더니 강천산에 산딸나무 산딸꽃 때문에 강천산 유월이 옳다네 바위 사이를 돌아 흰 자갈 위로 흐르는 물위에 하얀 꽃잎처럼 떠서 나도 이 세상에 귀를 열 수 있다면 눈을 뜰 수 있다면 이 세상 짐을 다 짊어지고 나 혼자라도 나는 강천산에 들라네 이 세상이 다 그르더라도 이 세상이 다 옳은 강천산 때동나무 꽃 아래 가만가만 들어서서 도랑물 건너 산딸나무 꽃을 볼라네 꽃잎이 가만가만 물위에 떨어져서 ..
2020.07.06 -
등대 - 김선굉
저 등대를 세운 사람의 등대는 누가 세웠을까. 물의 사람들은 다 배화교의 신자들.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생의 노를 저어 부서진 배를 바닷가에 댄다. 등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배를 비끄러매고,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으로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른 길을 걷는다. 내 생의 등대가 저 깜빡이는 불빛 아니던가.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 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들.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이고 등불을 끈다.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24>등대 " 에서 가져옴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124/article/all/20150612/71821740/1
2020.07.01 -
후련한 수련 - 박성준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한 무리의 싱거움을 조롱하고 가는 입김 수련의 속내가 태양의 뿌리를 흔들며 연못을 개봉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리면 자꾸 모르는 이름만 가시를 쥐고서 여름을 방문하고 있소 외침이 될 때까지 몸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춤의 하소연이란 애인의 소란스러운 울음을 감싸 안을 때처럼 반짝이는 빈틈으로 여기에 거울을 깨고 있소 모르는 말이 건너오는 동안 바늘을 쥐고 삼베처럼 웃으며 깊은 혀를 꾹 다문 수련 저기 후련하게 수련이 물을 쥐고 솟아 있소 물속을 듣던 바위의 귀는 오래오래 초록을 껴안고 시시때때 하얀 발톱들은 잇몸 근처에서 자라나오 어쩌자구 물속에는 찡그린 미간들이 그리도 많아 물의 어깨를 비튼단 말이오, 비바람과 수련이 키스를 나누는 동안 ..
2020.07.01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2020.07.01 -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 . 19가 나던 해 새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메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2020.06.18 -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20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