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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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천상병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2020.08.08 -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2020.08.08 -
박재삼- 천년의 바람, 바람에 대하여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바람에 대하여 1 - 박재삼 결국은 우리는 바람 속에서 커 왔고나 그 바람은 먼 여행을 하고 지금도 안 끝나고 있다. 겨울의 아득한 들판 끝에서 봄의 노곤한 꽃 옆에서 여름의 숨차던 녹음 곁에서 그리고 드디어 이제는 빛나는 찬바람이 되어 소슬하게 가슴에 넘치게 수확의 열매와 함께 왔고나. 이 바람을 나는 나서 지금까지 거느리고는 왔으나 어쩔 것인가 아직도 그 끝을 못 잡고 어리벙벙한 가운데 살고 있네
2020.08.08 -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2020.07.24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넘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또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2020.07.24 -
빗방울 하나가 -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 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2020.07.21 -
젊은 날 - 문정희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 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손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 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 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플래카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 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2020.07.21 -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2020.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