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8. 17:55ㆍ강원도
동해시 발한삼거리에서 111번 버스를 타고 무릉계곡 입구에 도착하였다.
동해시버스노선이 2019. 12. 02 전면개편되었다고 한다. 카카오맵은 아직 반영이 안되어있다.
정면에 청옥산이 보이는 무릉 계곡 좌우로 쭉 뻗은 소나무 숲이 보기 좋다.
무릉계곡에는 무릉반석, 금란정, 삼화사, 학소대, 관음폭포, 쌍폭포, 용추폭포, 두타산성 등 명소가 많다.
금란정이 보이고 우측이 무릉반석이다.
김홍도는 조선 정조의 명을 받아 관동지역과 금강산의 절경을 금강사군첩에 그렸다. 그중에 "무릉계"는 무릉반석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와 두타산, 청옥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그린 작품이다.
무릉반석에 새겨진 글씨가 어지럽다. 옛사람들도 낙서를 좋아했던가보다.
금란정은 대한제국 때 삼척지방 향교 선비들이 북평동 단봉 석경 등에 건립한 정자를 1958년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였으며 무릉반석과 어울려서 본래 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무릉반석 글씨중 대표적인 암각서를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 지역의 대표시인 최인희 의 낙조 시비도 있다.
낙조/최인희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 따라 산길 더듬어 오르면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묵히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
운무 서렸다 흩어진 바위 아래
은은히 흔들리는 범종소리
백석 씻는 시낼랑 뒤로 흘려보내고
고개 너머 낡은 단청 산문은 트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맑고 시원한곳에 내 배를 띄우니
학(鶴)떠난지 이미 오래되어 대(臺)는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무릉정공 최윤상의 무릉구곡가 중에서-
강원도 동해의 두타산 삼화사는 조계종 월정사의 말사로서 642년 지장율사가 흑련대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864년 범일 국사가 상공암이라고 개명하였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이 사찰에서 후삼국의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여 이십년만에 대업을 달성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후 삼국에 얽힌 갈등과 증오의 감정을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내고자 상공암을 삼화사(三和寺)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44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보물 제1277호 삼층석탑이 단아한 모습을 보인다.
삼화사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 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212770000
치미가 놓여있는데 설명이 없어 그 쓰임새를 알 수 없다.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
주로 점토로 제작되고 있는데 용마루에 얹힐 수 있도록 하단부의 중앙에 적새[積瓦]와 연결하는 반원형 또는 방형의 홈이 가로로 패어 있어 고정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측면은 몸통과 깃 부분을 구획하는 굵은 돌대가 설정되어, 그 안쪽에는 침선(沈線)이나 꽃무늬를 배치하고 바깥쪽에는 봉황의 날개깃과 같은 단열(段列)이 층을 이루면서 호형(弧形)으로 길게 뻗어 있다. 앞면은 굴곡된 능골이 반전되고 있으며 뒷면은 무늬가 전혀 없는 공백 상태이거나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 형태이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한나라 때는 반우(反羽), 진나라 때는 치미, 당나라 때는 치문(鴟吻), 통일신라 때는 누미(樓尾)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 왔다.
고구려의 치미는 4∼5세기경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궁궐의 건물에서 그 흔적이 이미 나타나고 있고, 평양 부근의 여러 절터나 궁궐터에서 약간씩 출토되고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백제의 치미는 부여에 천도한 이후부터 많은 수량이 제작되고 유행하게 되어 일본의 아스카문화[飛鳥文化]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부소산의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출토된 치미가 유일하게 복원되어 그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뒷면에는 연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고 층단을 이룬 날개깃은 측면에서 보면 그 독특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고신라의 치미는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이다. 높이 182㎝, 너비가 105㎝인 동양 최대의 대형 치미로 양 측면과 뒷면에 손으로 빚어 만든 연꽃과 사람얼굴의 무늬를 서로 엇갈리게 번갈아 부착하고 있어서 주목되는데 그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조립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치미는 양 측면에 변형된 4엽의 꽃무늬가 배치되고 층단을 이룬 날개깃만이 단순하게 조각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데, 건물 내부의 닫집에 사용된 소형 치미와 돌로 된 치미도 제작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는 중국 당나라 후엽부터 유행된 치문의 영향을 받아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물을 뿜어내는 어룡형(魚龍形)으로 그 의장이 변형되고, 점차 용두(龍頭)·취두(鷲頭) 등의 새로운 장식기와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치미의 형태에서 벗어나 퇴화되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8359
절마당을 나와 조금 오르면 템플스테이에 사용하는 건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