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 이해인

2020. 10. 10. 19:53좋은 글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 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 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 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