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7. 11:35ㆍ좋은 글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들국화 - 이해인
꿈을 잃고 숨져 간
어느 소녀의 넋이
다시 피어난 것일까
흙냄새 풍겨 오는
외로운 들길에
웃음 잃고 피어난
연보랏빛 꽃
하늘만 믿고 사는 푸른 마음속에
바람이 실어다 주는
꿈과 같은 얘기
멀고 먼 하늘 나라 얘기
구름 따라 날던
작은 새 한 마리 찾아 주면
타오르는 마음으로 노래를 엮어
사랑의 기쁨에 젖어 보는
자꾸
하늘을 닮고 싶은 꽃
오늘은
어느 누구의 새하얀 마음을 울려 주었나
또다시 바람이 일면
조그만 소망에
스스로 몸부림치는 꽃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 술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 이었음해.
내 사랑하는 당신의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게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녁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깍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도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좋겠어
들국화 - 노천명
들녘 비탈진 언덕에 늬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이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걷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잎 두잎 두병 병들어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칠은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은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주려 나왔다
들국화야!
저기 늬 푸른 천정이 있다
여기 의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