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풍경 광교, 광통교

2020. 7. 5. 19:03서울

 

 

https://www.sisul.or.kr/open_content/cheonggye/intro/assets2.jsp

서울시 청계천소개 홈페이지에서 발췌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 도성건설 때로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다. 그러던 것이 1410년(태종 10) 8월 큰비가 와서 다리가 떠내려가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피해가 발생하자 옛 정릉(貞陵)의 무덤 돌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만들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으로 원래 오늘날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통교를 이 정릉의 무덤 돌을 가져다가 만든 데는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이 있었다. 즉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깊은 원한관계가 상당히 작용하였다. 1392년(태조 1년) 계비 강씨는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이방원을 물리치고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옹립하였다. 이 일로 계비 강씨는 이방원의 깊은 원한을 싸게 되었다. 그러나 계비 강씨는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1396년(태조 5) 3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자가 된 아들 방석 또한 1398년 (태조 7)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 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1차 왕자의 난).

한편계비 강씨를 무척 총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강씨가 죽자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중부 취현방(聚賢坊, 지금의 중구 정동일대)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이름하였다. 태조는 이 능을 조성할 때 특별히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으로 하여금 일류석공을 동원하여 당대 최고 수준의 석물(石物)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수 차례 행차하여 강씨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09년(태종 9)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성북동 정릉인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410년 큰비가 내려 흙다리인 광통교가 유실되자, 이 정릉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돌을 사용 하여 석교를 만들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강씨의 무덤돌로 다리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강씨에게 맺힌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통교는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행렬이 지나다니는 도성 제일의 다리로서 영광을 누렸으니 태종의 의도대로 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광통교의 위치는 지금 광교앞 도로아래이며 일제시대 도로확장시 모습이 훼손되었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