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향수 / 정지용

2019. 12. 19. 11:42좋은 글

향  수

                               정 지 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