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書)

2020. 5. 12. 14:41좋은 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