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선 작곡 3개의 가사 고향, 망향, 그리워

2020. 4. 29. 16:26MUSIC/가곡

채동선 작곡 정지용 시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채동선 작곡 박화목 시 망향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먼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렴아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득한 고향도 정들 것 일레라

 

 

 

채동선 작곡 이은상시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부칠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 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엔 그대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메다 가네

 

 

 

 

 

채동선(蔡東鮮,1901-1953)

 

1901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세망동에서 부호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난 채동선은 당시 벌교면에는 학교가 없어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40리길을 머슴과 함께 걷거나 업혀 다녔다. 졸업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당시의 경기고보에 입학한다.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1918년 당시 장안의 손꼽히는 바이올인 연주가였던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독일로 옮겨가 베를린 슈테르텐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1929년 귀국한다.

 

귀국후 서울에서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 동료인 최호영,이혜구 등과 실내악운동을 펴기 시작하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현제명 등과 바이올린을 지도했던 것이 채동선의 청년기이다.

 

 

채동선은 당대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누이 채동엽의 소개로 피아니스트 이소란과 결혼하여 서울 성북동에 터를 내리고 가끔 이화여전에 나가 외국어 강의를 하는 것 외에는 작품창작과 바이올린 연습에 열중하였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후생단 등 일제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면서 흰한복에 두루마기,검은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해 민족음악의 수립의 기초를 이 시기에 쌓았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당시 좌경음악가와 극우 세력의 중간에 서서 민족주의적인 음악가들의 단합을 역설하고 곧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하고 협회장이 되었다. 이때 교항곡 「조국」,「한강」,「독립축전곡」을 작곡했으며 「입성가」, 「3.1절의 노래」,「개천절의 노래」등을 작곡했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마음은 어디고 붙일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보네

 

이 노래는 이은상선생이 작사한 가곡「그리워」의 가사이다. 정지용의 시「고향」에 곡을 붙였던 것인데 정지용이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되어 제목을「그리워」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채동선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보성에 돌아오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일본인에 의해 짓밟히고 있어 그 원통하고 분함에 가슴이 아파 처절한 곡조로 한숨을 쉬며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음악가로서의 활동은 3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1기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바이올리스트와 작곡가로서 활동한 시기이며, 2기는 은둔하면서 작곡가로서 내실을 기하고 국악채보를 통해 민족음악 수립을 한 시기이고, 3기는 해방과 더불어 관현악.합창.취주악 활동을 한 시기이다.

 

 

채동선은 부산 피난 시절 양담배 등을 친구 김창국에게 얻어 장사를 했는데 고집이 강해 하루 종일 하나도 팔지 못하고 모든 식구들이 쫄딱 굶은 적이 많았다. 1953년 2월 2일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부산 생활의 고생으로 병을 얻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영양실조에다 복막염이 겹쳐53세로 생을 마감했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그의 사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1963년 6.26때 서울 성북동 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의 원본을 찾아내면서 사후 10년 뒤 빛을 보았다. 1989년에는 그가 자랑스런 보성사람임을 자각한 보성군 관계가들에 의해 총사업비 1,300만원을 들여 높이 3.6미터,넓이 3미터 크기의 기념비가 벌교 공원에 세워졌다.

 

입술이 메마른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 부활의 가곡을 이 땅에 떨구고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가곡 「고향」,「추억」,「동백꽃」, 「그 창가에」, 「또 하나 다른 세계」,「동해」,「갈매기」를 우리들 가슴에 아름답게 새겨져 애창되고 있다. 이러한 가곡을 남긴 민족작곡가의 흔적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이올이스트요 작곡가요 음악사상가로서 식민지 생활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채동선이었다.                                                           (펌글)